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두 명이 만든 록의 기적

by inadfor 2025. 6. 12.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서론

2003년 'Seven Nation Army'를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유명한 베이스 라인이 사실 기타로 연주된 거라는 걸 나중에 알고 더 놀랐다. 잭 화이트와 멕 화이트, 단 두 명이 만들어낸 사운드가 어떻게 이렇게 거대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2000년대 개라지 록 리바이벌의 선두주자였던 이 듀오는 록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밴드였다.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된 빨강과 하양의 이야기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시작은 1997년 디트로이트였다. 잭 화이트(본명 존 앤서니 길리스)와 멕 화이트(본명 메간 마사 화이트)가 만나서 밴드를 결성했는데, 처음에는 남매라고 했다가 나중에 부부였다는 게 밝혀졌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이혼했는데도 계속 밴드 활동을 했다. 이런 복잡한 관계가 오히려 밴드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줬다.

밴드 이름도 독특했다. 멕의 성인 화이트를 따온 건데, 잭도 결혼하면서 성을 화이트로 바꿨다. 그리고 빨강, 하양, 검정만 사용한다는 컬러 컨셉도 처음부터 확실했다. 의상, 악기, 앨범 커버까지 모든 게 이 세 가지 색깔로만 이뤄졌다.

디트로이트라는 도시 자체가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쇠퇴한 도시, 거친 블루스의 전통, 모타운의 유산 등이 모두 그들의 음악에 녹아들었다. 특히 잭 화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블루스에 빠져 있었는데, 이게 나중에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핵심이 됐다.

미니멀한 구성, 최대한의 효과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가장 큰 특징은 극도로 미니멀한 구성이었다. 기타와 드럼, 딱 두 가지 악기만으로 모든 걸 해결했다. 베이스가 없는데도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제약이 더 창의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됐다.

잭 화이트의 기타 연주는 정말 독특했다. 빈티지 장비를 고집했고, 특히 1960년대 이전의 기타들을 선호했다. 플라스틱 기타까지 사용할 정도로 실험정신이 강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기타 테크닉보다는 감정과 에너지를 중시했다.

멕 화이트의 드럼도 마찬가지로 미니멀했다. 복잡한 테크닉보다는 강렬하고 직관적인 비트에 집중했다. 사실 멕은 원래 드러머가 아니었는데, 잭이 가르쳐줘서 시작한 거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연주를 들려줬다.

초기 앨범들과 언더그라운드 시절

1999년 첫 번째 앨범 'The White Stripes'가 나왔을 때는 그냥 디트로이트 지역의 작은 밴드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만의 독특한 색깔이 확실했다. 'Jimmy the Exploder', 'Screwdriver' 같은 곡들에서 원시적이면서도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줬다.

2000년 두 번째 앨범 'De Stijl'에서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줬다. 'Hello Operator', 'Apple Blossom' 같은 곡들이 좋았다. 특히 'Death Letter'는 선 하우스의 블루스 곡을 커버한 건데, 잭 화이트의 블루스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2001년 'White Blood Cells'가 나오면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다. 'Fell in Love with a Girl', 'Dead Leaves and the Dirty Ground' 같은 곡들이 대학 라디오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Fell in Love with a Girl' 뮤직비디오는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져서 화제가 됐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인디 록 씬의 밴드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만의 독특함은 충분히 증명됐고, 곧 더 큰 무대로 나갈 준비가 돼 있었다.

'Elephant'와 전 세계적 성공

2003년 발매된 'Elephant'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를 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앨범이다. 첫 번째 트랙 'Seven Nation Army'부터 강렬했다. 그 유명한 인트로 리프는 사실 기타로 연주한 건데, 베이스 같은 소리가 났다. 옥타브 이펙터를 사용한 건데, 정말 천재적인 아이디어였다.

'Seven Nation Army'는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했다. 특히 스포츠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따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Da da da da da da da"라는 멜로디는 말 그대로 전 세계 공통어가 됐다. 한국에서도 축구 경기 때 자주 들렸다.

'The Hardest Button to Button'도 좋았다. 뮤직비디오에서 드럼 세트가 계속 복제되는 모습이 신기했다. 미셸 공드리가 감독한 건데, 정말 창의적이었다.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은 버트 바차라크 곡을 커버한 건데,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만의 해석이 돋보였다.

이 앨범으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메인스트림 성공을 거뒀다. 그래미 어워드도 받았고, 세계 투어도 매진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독특함은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듀오 밴드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됐다.

잭 화이트라는 아티스트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를 이야기할 때 잭 화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 1975년생인 그는 정말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었다. 기타뿐만 아니라 피아노, 드럼, 만돌린 등 여러 악기를 다뤘고, 송라이팅 능력도 뛰어났다.

특히 그의 기타 연주 스타일은 독특했다. 테크닉보다는 감정을 중시했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거칠게 연주했다. 이런 스타일이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원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기타 솔로도 복잡하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잭 화이트는 또한 뛰어난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모든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했고, 다른 아티스트들의 앨범도 많이 제작했다. 로레타 린, 베크, 알리시아 키스 등과도 작업했다.

패션 센스도 독특했다. 항상 빨강, 하양, 검정 옷만 입었고, 특히 빨간색을 선호했다. 머리 스타일도 자주 바뀌었는데, 항상 화제가 됐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잭 화이트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의 인기와 영향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인디 록 팬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2000년대 중반 홍대 일대의 클럽들에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음악이 자주 흘러나왔다.

'Seven Nation Army'는 한국에서도 정말 유명했다. 록 페스티벌에서 밴드들이 자주 커버했고,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패러디됐다. 그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었다.

아쉽게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한국에 내한 공연을 한 적이 없다. 2007년 해체하기 전까지 계속 기대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밴드 중 하나다.

하지만 국내 뮤지션들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듀오 밴드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미니멀한 구성으로도 강력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실제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영향을 받은 국내 밴드들이 많이 나타났다.

음악적 실험과 다양한 시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항상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2005년 'Get Behind Me Satan'에서는 피아노를 대폭 도입했다. 'Blue Orchid', 'My Doorbell' 같은 곡들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일부 팬들은 당황했지만, 음악적 진화라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The Denial Twist'에서는 마림바까지 사용했다. 록 밴드에서 마림바를 쓴다는 게 상상이나 됐나? 하지만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하니까 자연스러웠다. 이런 게 바로 그들만의 매력이었다.

2007년 마지막 정규앨범 'Icky Thump'에서는 다시 기타 중심으로 돌아왔다. 타이틀곡 'Icky Thump'는 정말 강렬했고, 'You Don't Know What Love Is (You Just Do as You're Told)'는 서정적이었다. 밴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라이브 공연에서도 항상 특별한 시도를 했다. 때로는 아카펠라로 노래하기도 하고, 잭 화이트가 혼자 피아노를 치며 발라드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예측 불가능함이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공연의 매력이었다.

갑작스러운 해체와 그 이유

2011년 2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갑자기 해체를 발표했다. 공식 발표문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끝내고 싶다"고 했다. 많은 팬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징조는 있었다. 잭 화이트와 멕 화이트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고, 잭 화이트는 다른 프로젝트에 더 관심을 보였다. 더 래콘테어스, 더 데드 웨더 같은 사이드 프로젝트들이 늘어났다.

멕 화이트도 음악보다는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아졌다. 사진 작업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예 음악계를 떠났다. 두 사람의 방향성이 달라진 거였다.

하지만 해체 발표는 정말 깔끔했다. 서로를 비난하거나 불화설을 퍼뜨리지 않고, 그냥 "아름답게 끝내자"고 했다. 이런 모습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다웠다.

잭 화이트의 솔로 활동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해체 후 잭 화이트는 솔로 활동을 본격화했다. 2012년 첫 솔로 앨범 'Blunderbuss'를 발매했는데,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줬다. 'Love Interruption', 'Sixteen Saltines' 같은 곡들이 좋았다.

솔로 활동에서는 더 다양한 악기를 사용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까지 동원해서 오케스트레이션이 풍부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잭 화이트만의 독특한 색깔은 유지했다.

라이브 공연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편성 밴드와 함께 하면서 더 웅장한 사운드를 들려줬다. 하지만 가끔씩은 혼자서 기타만 들고 나와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곡을 부르기도 했다.

써드 맨 레코드라는 레이블도 운영하고 있다. 바이닐 LP에 특히 집착하는데, 정말 독특한 아이디어들을 많이 시도한다. 색깔 바이닐, 특수 패키징 등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유산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록 음악계에 남긴 유산은 정말 크다. 우선 듀오 밴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두 명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이후 블랙 키스, 로열 블러드 같은 듀오 밴드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길을 닦아놨기 때문이다.

개라지 록 리바이벌의 선구자 역할도 했다. 2000년대 초 스트록스, 인터폴, 예 예 예스 같은 밴드들과 함께 록 음악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미니멀하면서도 강렬한 사운드는 많은 밴드들에게 영감을 줬다.

아날로그 녹음에 대한 집착도 의미가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일부러 빈티지 장비를 고집하면서 따뜻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나중에 많은 뮤지션들이 따라하게 됐다.

비주얼 아이덴티티도 중요한 유산이다. 빨강, 하양, 검정이라는 간단한 컬러 팔레트로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런 일관성 있는 브랜딩은 많은 아티스트들이 벤치마킹하는 사례가 됐다.

지금도 계속되는 영향력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해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Seven Nation Army'는 지금도 전 세계 축구 경기장에서 들린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한국 응원단이 이 곡에 맞춰 응원했다.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미니멀한 구성에 관심을 가진 밴드들이 많다. 복잡한 것보다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인기는 여전하다. 젊은 리스너들이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Seven Nation Army'와 'Fell in Love with a Girl' 같은 곡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에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음악이 영화나 광고에도 자주 사용된다. 특히 'Seven Nation Army'는 거의 클래식이 된 수준이다. 이런 지속적인 노출이 브랜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밴드다. 두 명이서 만든 음악이 이렇게 오래 기억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진정한 아티스트의 힘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새롭게 느껴지는 음악을 만드는 것 말이다.

잭 화이트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멕 화이트는 음악을 떠났지만 그들이 함께 만든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가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에 끝났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 같다.